생명수호활동

2020년 11월 12일(목) 낙태 반대와 생명 수호 미사 교구장 주교님 강론
  • 작성일2020/11/12 04:41
  • 조회 472
† 찬미예수님,
 
오늘 우리는 정부의 낙태죄 폐지 관련 개정안에 대하여 생명 수호를 위해 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임신 14주 이내의 태아는 낙태시킬 수 있다고, 그리고 15주부터 24주가 된 태아는 상담과 24시간 숙고를 한 다음 '사회적, 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가 가능하다는 법안을 내놓을 예정입니다
개정안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여성들의 결정권'이라는 것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인간들,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기 결정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사람의 생명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 어떤 결정권도 옳지 않다고 봅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자살이라는 것도 자기 결정권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절대적으로 하느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우리 결정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듯이, 우리 마음대로, 우리 결정에 따라 이 세상을 하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 생명인데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언제 생명이 시작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정자가 어머니의 난자와 결합하는 바로 그 순간인지, 1주가 지난 다음인지, 14주가 지난 다음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의사들이 모여서 14주부터 인간생명이다.’라고 합의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국회가 법안을 만들어 통과시킨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의 태아는 분명 생명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입니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39-45)
 
성모님의 태중 예수님, 그리고 엘리사벳 성녀의 태중 세례자 요한은 이미 한 인격체로서 아기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여깁니다.
다만 생명 곧 피가 들어 있는 살코기를 먹어서는 안된다. 나는 너희 각지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나는 어떤 짐승에게나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남의 피를 흘린 사람에게 나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창세 9,5)
그리고 특히 인간생명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사람의 피를 흘린 자 그자도 사람에 의해서 피를 흘려야 하리라.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창세 9,6)
예수님도 사람의 생명이 다른 어떤 생명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우리는 호수에 빠져 죽은 2000마리의 돼지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악령이 돼지 떼 속에 들어가서, 그 많은 돼지 떼가 호수에 빠져 죽는 것을 방치하셨을까요? 한 사람의 악령들린 자를 고치기 위해... 수많은 돼지들의 희생도 불사하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약자,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아야 할 의무를 강조합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분노를 터뜨려 칼로 너희를 죽이겠다. 그러면 너희 아내들은 과부가 되고 너희 아들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 (출애 22,23)
힘없고,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돌보시기를 당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약자들에게 베푼 자선 행위, 배고픈 이에게 빵 한 조각, 목마른 자에게 물 한잔 건네준 것 때문에 천지창조 때부터 준비한 하느님 나라를 선사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마태 25,4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40)
 
성경과 교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스스로 방어할 수 없는 약자들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탈출기에서 모세의 생명을 보호한 여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파라오의 막강한 권력에 대항하여, 모세의 어머니, 이집트의 산파들, 모세의 누이 미리암, 파라오의 딸은 모세의 생명을 지켰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보호한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 성 요셉, 그리고 동방박사들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미혼모였지만 아기 예수를 출산 하셨습니다. 성 요셉 성인은 예수를 죽이려는 헤로데의 칼날을 피해 머나먼 이집트 피난 길을 떠났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헤로데의 말대로 하지 않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습니다.
 
가장 잔악한 죄는 힘없는 사람들에게 가하는 폭력입니다. 태아는 가장 힘없는 약자입니다. 생명입니다. 낙태는 분명 살인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보다 더 잔인한 살인입니다. 낙태 행위는 여성 자신을 위해서도 해롭습니다. 낙태는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가해행위이기도 합니다. 육체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피해를 주는 가해행위입니다.
 
우리가 태아를 죽일 때, 세례자 요한과 같은 인물의 탄생을 가로막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태아를 죽일 때, 예수님과 같은 희망의 인물의 탄생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 아기의 탄생은 인류에 희망이었습니다. 지금도 아기의 탄생은 미래를 위한 희망입니다.
낙태는 희망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인류의 미래를 죽이는 행위입니다.


전쟁 중에 자신의 생명을 위해 상대편을 죽일 수 있습니다. 정당방위입니다. 태아를 출산하려면 산모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산모의 생명을 위해서 태아를 죽일 수 있습니다. 일종의 정당방위입니다. 그러나 태아를 위해 산모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입니다. 자신의 경제적 이유로/자신의 쾌락적 이유로/태아가 장애자라는 이유로/ 성폭력에 의한 임신이라는 이유로도 낙태가 합법화될 수 없습니다. 낙태죄가 폐지되는 것이 법적으로 정당화될지라고 교회법은 낙태는 여전히 죄가 됩니다. 모르고 짓는 죄도 죄이지만, 알고 짓는 죄는 더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