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수호활동

['찬미받으소서' 주간 기획 7] 안식일 정신과 생태적 회개: 근원적 전환의 길
  • 작성일2020/06/29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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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위기의 뿌리에 소비주의 문화가 있습니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바바라 크루거Kruger) 오늘날 소비는 “강박적”이고 “집착적”으로 변했습니다.('찬미받으소서' 203항) 자유는 소비의 자유를 뜻하게 되었고, 소유와 소비의 규모가 개인의 가치와 능력의 척도가 되면서 ‘돈’은 자발적 섬김의 대상, 곧 우상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성장의 이름으로 생산과 소비가 서로를 부추기는 세상의 근원적 전환은 우리 자신이 먼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변화”가 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반다나 시바Shiva)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법이니, “변화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우리 인간입니다.”(202항) 먼저 우리가 하느님이 세상에 새겨 놓으신 “질서와 역동성”, 곧 창조질서를 존중하는 인간으로 거듭나야 합니다.(221항) 우리의 변화된 생활양식은 기업과 정부와 정당에 “건전한 압력”으로 작용하여 변화의 추동력이 됩니다.(206항)
 


소비주의 문화 속에서도 “새로운 길”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205항) “타자를 향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격체로서 우리는 “다른 피조물들의 본질적 가치”를 깨닫고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와 절제를 할 수 있습니다.(208항)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교육과 영성입니다. 교육(education)은 우리 안의 가능성을 밖으로(‘ex’) 끌어내는(‘ducere’) 과정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 안에는 사랑이 가능성으로 담겨 있습니다. 창조질서를 존중하는 “생태 시민”의 형성이 목표인 생태 교육은 학교뿐 아니라 가정과 교회와 정당 등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가능합니다.(210-214항) 영성은 삶의 원리로써 “우리의 개인적 공동체적 활동에 자극과 동기와 용기와 의미를 주는 어떤 내적인 힘”을 뜻합니다.('복음의 기쁨' 261항) 생태 영성을 함양하려면 “생태적 회개”가 필요합니다.(217항) 생태적 회개는 “예수님과의 만남의 결실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온전히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뜻합니다.

개인의 생태적 회개는 세상의 근원적 전환에 꼭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사회 문제들은 단순히 개인적 선행의 총합이 아니라 공동체의 협력망을 통하여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219항) 성경의 ‘안식일’은 개인적·사회적 차원의 변화를 뒷받침하는 소중한 전통입니다. 안식일은 '탈출기'와 '신명기'의 십계명에 나옵니다.(탈출 20,8-11; 신명 5,12-15) '탈출기'는 창조주 하느님이 “엿새 동안....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합니다.(20,11) 안식일은 하느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날입니다. 히브리어 어원으로 안식은 ‘멈추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엿새의 창조에서 매일 마지막에 반복되는 “보시니 좋았다”는 하느님의 안식을 전제합니다. 보려면 멈춰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창조 행위를 ‘멈추시고’ 그날의 창조 결과를 바라보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렛날의 안식에서 하느님은 창조의 ‘모든’ 결과를 관조하고 음미하십니다. 창조는 인간이 아니라 안식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안식은 “관상하는 안식”입니다.(237항) 하느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우리의 안식일은 우리 자신의 활동을 관조하고 음미하는 때입니다. 안식은 활동과 대립하거나 “비생산적이며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활동을 완성합니다. 안식은 우리의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또 다른 방식의 활동”입니다. 우리는 안식으로 세상을 “일구고 돌보는” 노동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을 벗어나 밖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안식은 “공허한 행동주의”와 “배타적 개인적 이득”만을 추구하는 “끝없는 탐욕과 고립감”을 방지해 줍니다.(237항) 이렇게 보면, 안식은 진정으로 우리에게 축복이자 거룩한 시간입니다.(창세 2,3)

안식일의 배경인 출애굽은 노예 신분을 벗어나 인간의 온전함을 회복하는 해방이 안식일 정신임을 알려줍니다. 안식일은 주인보다 사회적 약자인 “아들과 딸, 남종과 여종, 이방인”에게 최소한의 존엄과 평등을 보장합니다. “소와 나귀, 집짐승”에게도 적용되는 안식일 계명은 모든 피조물의 존중과 돌봄을 요구합니다. 안식일 정신은 안식년과 희년으로 확대, 심화됩니다.(레위 25,2-7.10-13) 안식년은 땅을 묵히는 ‘휴경’으로 땅의 휴식을 배려합니다. 묵힌 땅에서 나오는 소출은 주인만이 아니라 모두의 것입니다. 안식년 규정을 포함하는 희년은 빚 탕감과 땅 무르기를 통한 해방과 원상회복으로 창조질서를 회복합니다. 이렇게, 안식년과 희년은 이웃과 지구와의 관계에서 “균형과 공정”을 보장하고, “땅의 결실”을 모두의 것으로 인정하여 창조질서의 보전과 회복을 꾀합니다.(71항) ‘일’을 멈추는 안식의 정신은 자발적 ‘자기 제한’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안식으로, 우리는 자신의 활동을 성찰하고 타자와 관계를 창조질서와 조화를 이루도록 쇄신합니다. 안식으로, 사회적 약자와 동물과 땅이 쉬도록 배려하여 창조질서를 회복합니다.'신명기'는 안식일의 배경으로 출애굽 사건을 듭니다.(신명 5,14-15) 사실, 십계명 자체가 ‘출애굽의 하느님’으로 시작합니다.(탈출 20,2) 당시 이집트는 파라오를 정점으로 한 고도의 통제와 억압 사회였습니다. 파라오를 비롯한 소수의 고관은 히브리인을 포함한 다수의 착취와 희생으로 물질적 풍요와 소비를 누렸습니다. 출애굽 사건으로 야훼 하느님은 사람들을 억압에서 해방하시는 분으로 드러났습니다. ‘과부, 고아, 떠돌이’의 편인 야훼 하느님은 이집트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신들과 큰 대조를 이룹니다. 그 신들은 강자의 신이었으며 국가의 지배 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첫째 계명(20,3)은 해방된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같은 억압적 체제의 사회를 건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야훼 하느님만을 섬기라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인 모든 사람의 존엄과 평등을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자발적 자기 제한의 모범은 나자렛 예수입니다. 육화와 십자가 사건은 자기 비움(κένωσις, 필리 2,6-8)의 절정입니다. 예수의 삶은 육화의 충실한 지속이며 십자가 죽음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예수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님의 은혜로운 해”인 희년을 선포했습니다.(루카 4,18-19; 이사 61,1-2) 안식일 정신의 실천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던 예수는 ‘하느님나라’를 창조질서의 온전한 실현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는 창조질서의 맥락에서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해치는 온갖 종류의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창조질서 회복의 일환이었던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에 대한 예수의 관심과 연대는 모든 피조물을 아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회개가 예수의 삶에 자신을 조율하는 것이라면, 생태적 회개는 예수의 삶을 따라 안식일 정신의 자발적 자기 제한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우리의 결단일 것입니다. 이 회개는 사물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뽑아내기만 하려는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을 거부하고, 소유와 소비가 자랑인 문화에서 “적은 것이 많은 것”이라는 확신을 수용합니다.(222항) 작은 것이 아름답고,(에른스트 슈마허Schumacher) 작은 것이 큽니다.(시바) 단순과 절제와 검약의 삶으로 구현되는 생태적 회개는 폭력적인 소비주의에 희생되는 자연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내미는 화해의 손짓이 됩니다. 우리가 자발적 자기 제한의 안식일 정신으로 주일을 지내며 우리 자신을 변화시킨다면, 모든 생명을 착취하는 오늘날의 폭력적 소비문화는 “서로를 돌보는 작은 몸짓”으로 이루어지는 “돌봄의 문화”에 차츰 자리를 내줄 것입니다.(231항) 안식일 정신에서 비롯되는 생태적 회개는 세상에 고요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균열을 낼 것입니다. 근원적 전환의 시작입니다.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녹색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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