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받으소서' 주간 기획 6] '근원적 전환'이 필요하다
- 작성일2020/06/25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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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두 하나의 지구, 공동의 집에서 살고 있다는 의식은 매우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글로벌 의식을 결집하여 개별 국가가 해결할 수 없는 국제적 차원의 사회·환경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룰 방법들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찬미받으소서' 164항) 기후변화를 비롯한 글로벌 생태 문제에 대한 진단과 대응 과제는 명확해졌지만, 응답은 미흡하고 변화는 더딥니다.
1972년 스톡홀름에서 ‘유엔인간환경회의’가 열린 이후 1992년 ‘유엔환경개발회의’(리우 선언), 2002년 ‘지속가능발전세계정상회의’(리우+10), 2012년 ‘유엔지속가능발전정상회의’(리우+20) 등의 국제회의가 있었습니다. 규모에 비해 결과는 초라했고, 그 결과도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글로벌 생태 문제의 심각성과 국제적 협력의 어려움을 고려할 때 “실행 가능한 국제협약”이 절실합니다.(173항)
2015년 5월 프란치스코 교종은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반포했고, 9월에 열린 유엔 총회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17개를 발표했으며, 12월에는 195개국이 ‘파리기후변화협약’을 체결했습니다. 모두가 기후위기를 비롯한 글로벌 생태위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파리기후변화협약 이후 기후위기에 대한 국제적 대응은 여전히 지지부진입니다. 2018년 인천에서 열린 제48차 IPCC(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 총회가 채택한 ‘1.5도 특별보고서’는 산업화 이후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1.5도로 억제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 권고를 따르려면 전 세계가 탄소배출을 2030년까지 2010년 대비 45퍼센트 감축하고 2050년에는 ‘탄소 제로’를 달성해야 합니다. ‘대충’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이 권고는 현대 세계의 생산과 소비 양식에 대한 ‘근원적 전환’으로만 실행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선 나라는 소수입니다. 지난해 12월 마드리드의 COP25(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는 구체적인 탄소 감축안 도출에 실패했고, 올해 12월 글라스고우에서 예정되었던 COP26은 코로나19 감염으로 연기되었습니다.
코로나19 재난으로 우리가 ‘위험 사회’에서 살고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산업화 이후 세상이 발전할수록 위험도 커졌습니다. ‘후쿠시마’급 핵사고는 우리나라 전체를, 임계점(tipping point)을 지난 기후변화는 세계 전체를 재앙에 빠뜨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합리적으로 예측되는 미래의 재난에도 사람들은 “설마” 하며 움직이길 거부합니다.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의 위험보다 현실의 편익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코로나19 재난은 ‘설마’가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일단 재난이 덮치자 우리는 제대로 준비도 못하고 생소한 세상으로 떠밀려 갔습니다. 21세기에 부쩍 늘어난 바이러스 감염은 발전의 부산물인 기후변화나 숲 파괴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추정들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었습니다. 우리가 재난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확대하는 시스템을 계속 고집하면 가능성이 현실이 될 확률은 그만큼 커집니다. 어차피 변화는 불가피합니다. “강제된 변화인가 자발적 변화인가?” 이 물음을 직시하고 고민한다면, 엄청난 재난을 불러온 코로나19가 우리의 미래를 위한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근원적 전환의 때가 도래했습니다. 산업화 이후 세상을 지배해 온 성장과 개발 패러다임의 실상이 드러났습니다. 물질적 풍요를 약속했던 성장과 개발로 자연은 파괴되었고,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와 함께 삶이 피폐해졌습니다. 만족과 여유가 아니라 긴장과 경쟁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하는 사람들이 급증했습니다. 풍요는 소수의 풍요를 뜻했습니다. 근원적 전환은 성장과 개발이라는 우상 또는 환상의 거부로만 시작할 수 있습니다.
1972년 ‘로마클럽’이 발표한 "성장의 한계"는 본격적으로 성장에 의문을 제기했고, 1992년 ‘리우 선언’은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용어를 채택했습니다. 하지만 발전이 성장을 뜻하는 한, 지속 가능한 발전은 ‘모순’이거나(레오나르도 보프)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유한한 하나의 행성인 지구에서 성장에 한계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은 불가능합니다. “지속 가능한 성장에 대한 논의는 흔히 주의를 다른 곳에 돌리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194항) 성장과 개발은 ‘지속 가능’이란 수사로 변신에 성공했고,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과 지구의 울부짖음은 더 커졌습니다.(49항)
최근 우리 정부는 포스트 코로나 대응 방안으로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을 두 축으로 하는 ‘한국판 뉴딜’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그린 뉴딜에서 정작 ‘그린’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산업 문명의 ‘발전’에 대한 고민은 없고 경기 부양을 위한 ‘사업’만 있습니다. ‘그린’을 말하면서 하루속히 ‘회색’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근원적 전환은 “이윤이 유일한 판단 기준”인 시장 논리로 성취할 수 없습니다.(187항) 공동선을 위해 선택하는 이 전환에는 큰 고통과 부담과 불편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윤 극대화의 원칙”으로 작동하는 시장은 “미래 자원이나 환경의 건강” 훼손은 개의치 않습니다.”(195항) 신자유주의 세계화 경제에서 시장은 “새로운 독재”로 등장했고,('복음의 기쁨' 56항) 교육과 건강을 비롯한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을 효율과 이윤으로 환원, 평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경제에 정치가 필요합니다. 정치가 경제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고, 경제에 정치가 빠져서도 안 됩니다.(189,196항) 경제가 자신의 토대인 사회적, 생태적 맥락을 무시하고 이윤 극대화의 시장 원리로만 작동하지 않도록 정치가 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정치가 공동선의 증진이라는 제 몫을 할 때, 경제는 “효율 중심의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에 종속”되지 않고 ‘살림살이’라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189항) 근원적 전환은 정치적 행위입니다.
“성장 신화를 넘어 지속 가능한 세상으로” 올해 가톨릭교회가 발표한 ‘환경의 날’ 담화문 제목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속해야 할 것은 성장이나 발전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세상이 지속하려면 “발전의 개념을 새로 정의”해야만 합니다.(194항) 이미 반세기 전 가톨릭교회는 “발전이 단지 경제 성장으로 국한”될 수 없으며, 올바른 발전은 “온전한(integral) 발전”이라고 천명했습니다.('민족들의 발전' 14항) 온전한 발전은 모든 사람의 발전과 영적 차원을 포함한 전인적 발전을 지향합니다. 사람이 온전한 인격체로 발전하려면 타인은 물론 다른 피조물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필수입니다. 온전한 발전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 그리고 다른 피조물의 존중과 돌봄이라는 창조질서의 보전, 곧 정의와 평화를 요구한다는 뜻입니다.
환원주의적 경제 발전의 개념과 달리, 온전한 발전의 개념에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에 대한 관상과 음미, 절제와 희생, 자족과 친교와 같은 성장의 제어 장치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제어 장치를 적극적으로 가동하여 “생산과 소비의 속도를 줄이면 다른 형태의 진보와 발전을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191항) 우리가 참된 행복과 만족을 누리는 것은, 다른 피조물들과 조화 속에서 공존하는 것은 경제 성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온전한 발전으로만 가능합니다.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녹색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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